난생 처음 시도한 나의 가출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담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나는 오히려 약간 들 떠 있었습니다. 나의 잘못으로 비롯된 것이지만 아늑한 보금자리가 아니라 이제는 음습한 동굴 같은 집을 떠난다는 것이 우선 그렇습니다. 또 이제껏 엄마의 보살핌만을 받아 왔던 내가 모처럼 홀로 서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용돈이 두둑했던 것도 힘이 됐습니다. 낭비벽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기에 엄마가 정기적으로 주는 용돈은 항상 남았고, 가끔 외갓댁 어른들이 뭉칫돈으로 준 것도 그대로 모아둔 것이 한달쯤은 세끼 밥을 사먹으며 여관에서 잠을 자도 버틸 수 있는 액수였습니다.
우선 친구집에 베이스 캠프를 차리고 한 일주일쯤 여행을 하며 머리를 식히자. 그 다음 어디 취직이라도 해서 일단 자립하자. 항해를 떠난 신드밧드 처럼 보물을 발견할 수도 있다. 성공한 뒤 엄마를 만나면 떳떳하게 용서를 구하고 밀렸던 효도를 보충하자. --- 이렇게 모험심까지 충만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일이 뒤틀리더니 나중에는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처음 찾아간 친구의 자취방에서는 몇시간만에 대판 싸움을 벌이고 뛰쳐 나와야 했습니다.
이제는 어엿한 대학생이 된 친구는 나를 반갑게 맞아 주며 '특제 라면'으로 아침상을 마련 했습니다.
"야, 나는 네가 어머니와 싸우고 집을 나왔다는게 도대체 이해가 안 돼."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나는 엄마가 화제가 되는 것 자체가 싫어 얼버무리려 했습니다.
"임마, 그럴 수도 있다니...? 너의 어머니는 누구나 인정하는 KS 천사표 아니냐? 내가 항상 너를 부러워 했던 것이 그런 엄마를 가졌다는 점이었어."
중학교부터 함께 다니고 몇차례 우리집에도 놀러 온 적이 있는 친구는 그 전에도 자주 비슷한 말을 했었습니다.
"그렇게 좋으면 네 엄마 해라."
"엄마가 둘씩 있으면 뭘 하니. 하지만 너의 어머니가 10년만 젊었어도 나는 애인을 삼고 싶어. 정말 내 이상형이야. 꽉 움켜 잡고 놓아주지 않을 껄."
"뭐라고, 이 새끼야!"
나는 밥상을 걷어 차고 친구에게 주먹을 날렸습니다. 어안이 벙벙해 하던 친구도 "이 새끼가 미쳤나?" 라며 반격을 가해 왔습니다. 힘으로 밀리는 나는 입술이 터지고 눈 가에는 멍이 든 채 쫓겨나듯 그 집을 나와야 했습니다.
뒷날 그 친구는 당시 나보다 더 분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친구 어머니를 희롱거리로 삼았다는 것이 원초적인 잘못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며 편지와 전화로 사과하며 나에게 화해를 청해 왔습니다.
하지만 나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분이 안 풀려서가 아니라 떳떳하지 못한 나 자신 때문이죠. 이렇게 해서 나는 내 인생의 절친한 친구 하나를 영원히 잃었습니다.
서울역을 향하는 중 얻어맞은 상처는 점점 더 아파 왔습니다. 마음은 더 찢어질 듯 했습니다.
진정 친구에게 미안했습니다. 웃어 넘길만한 가벼운 농담이었는데... 더구나 친구의 말은 백번 옳았죠. 엄마는 누구나 인정하는 KS 천사표가 분명합니다.
당시 나는 18살, 엄마는 21살에 나를 낳았으니 꼭 20년 차이인 38살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6살 때 육군대위로 전방부대의 중대장이었는데 기동훈련 중 차랑 전복사고로 순직하셨다고 합니다. 그후 엄마와 나는 한동안 시골에 있는 할아버지 댁에서 살았습니다.
그 이웃에는 큰아버지 댁도 있었는데 언제나 술에 절어 있는 듯한 할아버지, 무척 심술궂어 보였던 할머니, 그리고 자주 나를 괴롭혔던 사촌형제들의 기억이 가끔 납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에 진학할 때 엄마와 나는 서울에 있는 외할아버지 댁으로 이사했습니다.
당시 외할아버지는 고등학교 교장이었고 큰 외삼촌은 대학교수. 둘째 외삼촌은 사업을 하며, 막내 외삼촌은 신문기자였습니다, 외갓댁은 할아버지 댁에 비해 훨씬 부유했고 모든 사람들이 내게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외갓댁에서 엄마는 출근을 하다 얼마동안은 집에서 쉬기도 하고 몇차례 직장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현재 사는 집 근처에 구멍가게를 차렸습니다. 이를테면 독립을 한 거죠.
그런데 그 집이 헐리는 바람에 2년 전에 살림집이 딸려 있고 보다 큰 지금의 점포로 이사 했습니다. 그후 장사가 너무 잘 돼 판매원 아줌마까지 한명 고용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엄마와 단둘이 살아 오면서 나는 경제적 궁핍은 물론, 외로움이니 고통이니 하는 것은 전혀 모르고 살았습니다. 엄마는 늘 한없이 따뜻하고 다정했으며 나는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에 하나도 막힘이 없었으니까요.
다만 좀 덤덤한 모자관계라고는 할 수 있습니다. 홀어머니와 외아들간인데도 TV 드라마 같은데서 보듯 끼어안고 뽀뽀를 해준다거나 하는 살폿한 정감은 없었습니다.
나 자신이 재롱을 떨거나 아양을 부릴 줄 모르는데다, 엄마는 다정하면서도 항상 근엄함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외갓댁에서 교육 받은대로 엄마에게 깍듯이 존칭어를 써 온 것도 모자간에 일정한 거리감을 두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껏 엄마를 이성으로 연모했다거나 성적 대상으로 삼았던 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물론 나도 사춘기를 지나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성적 호기심이나 욕구도 커지고 있었습니다. 그 해소책의 하나로 중학생 때부터 거의 주기적으로 자위를 해 왔습니다.
그러나 자위를 할 때도 골목에서 자주 만나는 여학생이나 요정 같은 팝가수, 풍만한 몸매의 포르노 배우들을 연상했지, 엄마를 자위 중의 상상 파트너로 등장시켰던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엄마의 재혼 문제는 한번 짚고 넘어가야겠군요.
엄마는 누구나 마주치면 뒷모습이라도 한번 더 보고 싶다고 뒤돌아 볼만큼 미인 타입이었습니다. 그런 엄마에게 재혼의 권유는 내가 어릴 때도 직,간접으로 여러번 들었습니다. 심지어 엄마의 시집 식구들에게서도 그런 말들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곳으로 이사온 뒤에도 동네 아줌마들이 운을 떠보기도 하고 직접 추근대는 남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전혀 동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얼마나 매멸차게 거절을 하는지 다시는 그 사람이 입에 올리지조차 못 했습니다.
혹 엄마가 재혼을 했거나 정부를 두고 바람을 피웠다 한들, 자기 주장이나 반항심 같은 것은 없는 나는 아마 그냥 환경에 순응했을 것입니다.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내 기분은 더욱 막막하고 울적했습니다.
벽면의 열차시각표에는 빽빽히 행선지가 나와 있지만 나를 반겨 주거나 가고 싶은 곳은 없었습니다. 연고지라고는 경북의 한 소도시에 있는 할아버지 댁 뿐인데 몇년 째 왕래도 없다가 대학에도 낙방한 처지로 그곳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 이 기분으로 강릉이나 목포를 가 본들 무얼 한다지...? 좀 더 마음을 정리한 뒤에 다시 오자는 생각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극장이며 거리를 배회하다 밤 늦게 잡은 잠자리에서도 곤욕을 치뤘습니다. 내가 들어간 여관 부근이 윤락가였던 모양입니다.
나를 안내한 할머니는 "학생, 색시 하나 소개 해 줄까? 4만원이면 돼" 라고 말을 걸었습니다. 거절했더니 나가다 다시 방문을 열고는 손가락 세개를 펴 보이며 "3만원에 해 줄께" 라고 하더군요.
인터폰으로 물을 청했더니 나보다 몇살은 더 들어보이는 여관보이가
"사장님, 아가씨 하나 소개 해 올릴까요? 민짜에요" 라고 말을 겁니다.
침대에 누워 억지로 잠을 청하다 노크 소리에 문을 열어 보니 속옷차림의 여자가 "오빠, 한번만 놀아 주라. 오늘 마수도 못 햇단 말야" 라며 매달립니다.
그들을 모두 퇴치 했어도 쉽게 잠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밤새도록 옆방의 침대 삐그덕 거리는 소리, 주정꾼들의 소란, 여자들끼리 싸우는 앙칼진 욕설들, 물을 좍좍 붓는 소리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수학여행을 빼고는 처음으로 혼자 하는 외박에서 바깥세상이 얼마나 살벌하고 삭막한가를 뼈저리게 실감 했습니다.
그 후로는 더욱 험한 꼴들을 많이 당했고 무엇 하나 제대로 풀리는 것이 없었습니다.
극장에서는 졸다가 옷가방을 몽땅 도둑 맞았습니다. 구로동 공장지대를 거닐다가는 시계와 지갑을 털렸습니다. 그나마 안주머니에 따로 챙겼던 현금 일부를 안 털린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종업원 구함'이라는 팻말을 보고 중국음식점에서도 하루만에 뛰쳐 나왔습니다.
초보라고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만 배달을 시키고, 홀과 주방의 청소를 도맡는 것은 견딜 수 있었습니다. '신고식'이라며 소주와 안주값 몇만원을 떠 안기는 것도 참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5명이 겨우 몸을 눕힐 수 있는 비좁은 방에서 제일 고참이 웃통을 훌렁 벗어 제치고 이를 잡는 것을 보고는 정나미가 떨어 져 도저히 더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집을 떠난 후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수시로 나타나는 엄마의 환영이었습니다.
험한 꼴을 당할 때, 혹은 외로움이 밀려 올 때, 나는 곧잘 집과 엄마를 떠 올렸습니다. 그럴 때 집은 향기와 더운 물이 가득한 욕조나 한없이 푹신한 쇼파로 등장합니다. 엄마는 말 그대로 지고지순한 천사, 그윽한 눈길과 미소만으로도 내 마음은 평안하고 아늑해 집니다.
그런데 곧 이어 벌거벗은 엄마가 나타 납니다. 음모가 수북한 그곳이 클로즈 업 되기도 하고, 요염하게 웃으며 내게 손짓을 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바지 속의 페니스는 어김 없이 빳빳해 집니다.
도대체 왜 그러니? 두번씩이나 그 짓을 해 봤지만 좋은 것은 하나도 없었잖아? 오히려 환멸과 후회만 가득 했었지... 스스로를 꾸짖고 탓해봐도 또 하나의 나는 혀를 낼름거리며 그 반쪽을 비웃는듯 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다시 벌거벗은 엄마가 나타 납니다.
유일한 해소책은 자위를 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극장에서나 커피숍에서나 공원에서나, 거리를 거닐다가는 아무 빌딩이나 들어가서 나는 화장실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페니스를 잡고 급히 흔들어 댔습니다.
욕구의 충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잊기 위해서, 죄책감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 나 자신을 벌 주기 위해서...
다시 서울역을 찾았을 때 나는 심신이 모두 탈진한 상태였습니다.
아직 한낮인데도 몰골이나 옷차림이 초췌해진 탓인지 나는 정복 경찰, 사복 형사, 의경등으로부터 4차례나 검문을 받았습니다.
도저히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습니다. 나는 결국 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참, 그때는 한강이나 달리는 기차에 뛰어 들겠다는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아마 멀리서나마 우리집 간판만이라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간절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퉁이를 돌자 마침 점포 앞에 있던 판매원 아줌마가 먼저 나를 보더니 급히 몸을 돌리더군요. 엄마에게 내가 돌아온 것을 알리려는 거겠죠.
"학생, 오랫만이네."
집앞에 이르자 아줌마가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나도 "안녕하셨어요" 라고 답례를 했지만 나란히 서 있는 엄마에게는 말을 걸지 못한 채 엉거주춤 서 있기만 했습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래, 잘 놀다 왔니?"
엄마가 한걸음 내 디디며 그 침묵을 깨 주었습니다.
"우선 몸이나 씻으렴. 그동안 식사를 준비할께."
나는 엄마에게 결국 한마디도 못한 채 안채로 향했습니다.
샤위를 하고 나오니 엄마 대신 판매원 아줌마가 식탁에 음식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사장님이 많이 편찮으셔요."
종업원이라고 딱 한명 뿐인데도 아줌마는 늘 엄마를 사장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아까 언뜻 볼 때도 엄마는 입술이 부르트고 피부는 윤기를 잃은 까칠한 모습이었습니다. 새삼 송구스런 마음이 북받쳤습니다.
식탁은 성찬이었습니다. 짧은 시간인데더 이처럼 각종 반찬이 구비된 것을 보면 엄마의 솜씨와 배려가 분명합니다.
문득 "돌아 온 탕아에게 살 찐 송아지를 대접해 준다"라는 성경 속의일화가 떠 올랐습니다.
하지만 감상에 오래 빠져 들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허겁지겁 먹어 댔습니다. 가출해서 굶주리지는 않았지만 오랫만에 정들고 입맛에 맞는 음식의 유혹에 나는 것잡을 수 없이 빠져 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쌓였던 피로에 식곤증까지 겹쳐 나는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너 좀 일어나 봐!"
거칠게 내 몸을 흔드는 서슬에 잠이 깨었습니다. 눈을 떠 보니 엄마의 얼굴이 가득히 들어 왔습니다. 너무 가까이 있다 싶어 얼굴을 뒤로 빼려는데 엄마의 손이 날아 왔습니다.
"이 나쁜 놈아!"
얼마나 세게 쳤는지 나는 다시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습니다.
"이 나쁜 놈아! 너는 나쁜 놈이야! 나쁜 놈. 나쁜 놈. 나쁜 놈..."
엄마는 똑같은 말만 반복하며 양손을 번갈아 나의 뺨을 때렸습니다.
나는 그 때 엄마의 얼굴을 보며 사자를 연상했습니다. 눈은 잔득 충혈되고 일그러진 입에서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절규... 그것은 분노나 원망같은 말로 표현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 모습과 행동에는 맹수의 잔인성과 공격성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맹수의 폭력과 포효에 아무 저항도 방어도 하지 못한 채 몸을 내맞길 뿐아었습니다. 그렇게 맞다 보니 오히려 마음은 편해 왔습니다.
맹수가 먼저 지쳤습니다. 때리기를 멈추더니 나를 끌어 안으며 내 가슴에 얼굴을 묻더니 여전히 짐승의 포효 같은 소리로 통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감정도 격해 졌습니다. 나도 엄마를 끌어 안고 엉엉 소리를 내면서 함께 울었습니다.
"엄마, 내가 잘못 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께요.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어깨를 들먹거리며 통곡하는 엄마를 끌어 안고 다독거리며 나도 게속 눈물을 펑펑 쏟아 냈습니다.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부둥켜 안고 울어 댔습니다.
그 눈물은 우리 모자의 모든 갈등을 해소하는 청량제며, 나에게는 속죄의 구원줄이기도 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집을 떠난 후 나는 고통을 겪을 때나 그리움이 북받치면 가끔 눈물을 흘렸습니다. 태어난 후 처음으로 많이 운 셈입니다. 하지만 찔끔찔끔 흘렸던 눈물은 가뭄 속의 가랑비처럼 오히려 갈증만 더 해 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실컷 울어 버리니 몸도 마음도 가뿐해 질 뿐 아니라 나의 잘못도 어느 새 다 용서를 받은 것 같았습니다.
"엄마, 정말 내가 잘 못 했어요. 다시는 절대 안 그럴께. 이제부터는 그런 충동만 생기더라도 내가 먼저 죽어 버릴 꺼야."
내 가슴에 얼굴을 품고 있던 엄마는 고개를 들었습니다.
"너 이 자리에서 나한테 두가지 만은 분명히 약속 해. 앞으로 절대 죽는다는 소리를 하지 않을 것, 또 절대로 이 에미 곁을 떠나지 않을 것."
엄마의 표정은 다시 맹수가 되어 단호 했습니다. 나는 "네" 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엄마는 다시 나를 왈칵 껴 안으며 울음을 타뜨렸습니다.
"아빠를 잃고 나서 엄마는 이 세상에 단지 너 하나 뿐이야. 부디 이 에미를 떠나지 마. 너만 내 곁에 있으면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내가 무슨 일을 당하든지 다 좋아. 부디 내 곁을 떠나지 마."
"엄마, 저도 마찬가지예요. 집을 나가서야 엄마와 우리 가정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늑한가를 절실히 느꼈어요. 다시는 안 그럴께요."
우리는 또 굳게 포옹했습니다.
엄마는 이따금 내 가슴에 파묻었던 머리를 들고 "약속하지?" "맹서하지?" 라고 되묻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한 미소로 답 했습니다.
갑자기 엄마가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엄마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잠이 들어버린 것입니다. 엄마의 갸날픈 얼굴을 보며 나는 연민의 정이 솟구쳤습니다.
나는 엄마 방에 이부자리를 깔고 엄마를 가뿐히 안아 옮겼습니다. 숨소리도 고르게 깊이 잠든 그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습니다.
육욕 같은 감정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천사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나의 보호가 절실히 필요한 한마리의 가여운 새이기도 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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